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5인 사건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105인 사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꾸며진 [[일본 제국|일제]]의 자작극으로도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[[신민회]]가 공식 해산되고 105명이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되어 고생을 치러야만 했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. 당시 공식적으로는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큰 사건(?)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 결과 체포된 105명 중 99명이 무죄 석방되었고 윤치호·양기탁·이승훈 등에게 [[징역]] 5년 ~ 6년이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그나마 대부분은 형 만기 이전에 석방되었다. 사건 자체가 자작극이라서 일제로서도 막 나가기 곤란했고 변호인들도 이러한 약점을 노려서 집요하게 무죄를 주장했기 때문이다.[* 당시 피고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일본과 조선에서 변호 능력으로 유명한 변호사들이었다.] 물론 사건 과정에서 고문 등으로 인한 인사들의 고통은 결코 적지 않았겠지만. [[야구]]를 전파한 것으로 유명한 [[필립 질레트]]가 [[영국]] 에딘버러 국제 기독교 선교 협의회에 "이 사건은 일제가 날조한 사건입니다."라고 사실을 밝혔다. 그리고 일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1913년 6월 [[중국]] [[상하이]]에서 열린 [[YMCA]] 지도자 강습회에 참석한 후 조선으로 돌아오려던 그를 [[조선총독부]]가 방해해 두 번 다시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. || [[파일:The_book_called_'percecuting_korean_church'_by_Syngman_Rhee.jpg|width=100%]] || || [[하와이]]에 도착한 [[이승만]]이 한 달동안 집필하여 출간한 《한국교회핍박》의 [[초판본]] 사진. || [[이승만]]은 [[우드로 윌슨]] [[미국 대통령]]에게 편지를 써서 "105인 사건은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증거"라고 조선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. 하지만 승전국인 [[일본]]의 [[식민지]] 따윈 안중에도 없던 [[미국]]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. 그 외에도 그는 미국의 각지를 돌며 "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데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"고 하며 미국이 기독교 국가임을 활용해 일본의 기독교 탄압을 알려 여론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. 105인 사건에 대한 "한국교회핍박"이라는 책도 썼다. 그러나 [[영국]]령이었던 [[영국령 홍콩|홍콩]]의 언론에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홍콩 그리스도인들은[* [[홍콩]]은 기독교인이 많으며 [[성공회]]의 동아시아 위원회가 있는 곳이다. [[중국인]] 최초 [[목사]]인 량파를 기념하는 량파 기념 교회도 홍콩에 있다.] 일제를 비판했다. 결국 영국 본토에까지 알려져 언론을 타고 일제는 체면을 구겼다. 그리고 같은 [[영연방]]인 [[캐나다]]와 [[호주]] 등에도 사건이 보도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